
제9화
10년
시점 · 헤라
바위에는 금이 아홉 줄 그어져 있었다.
헤라가 그은 것이었다. 올림포스 진영 끝, 골짜기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바위. 해마다 첫서리가 내리는 아침이면 그녀는 그 바위 앞에 섰다. 청동 단검을 꺼내 바위 표면에 대고, 위에서 아래로 한 줄을 그었다. 단검 끝이 돌에 긁히는 소리는 늘 같았다. 날카롭고, 짧고, 오래 남았다.
첫 해에는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둘째 해에는 포세이돈이 웃었다. 누이는 셈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다섯째 해쯤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일곱째 해에는 데메테르가 그 바위를 피해 다녔다. 아홉째 해, 하데스가 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그녀는 금을 셀 때마다 처음 금을 그던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단검을 쥔 손이 떨릴까 봐 두 손으로 쥐었다. 지금은 한 손이면 충분했다. 손이 익숙해진 것인지, 무뎌진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열 번째 아침이었다.
헤라는 단검을 꺼냈다. 날 끝을 바위에 댔다. 그리고 멈췄다.

처음에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첫해의 올림포스는 들떠 있었다. 형제들은 어둠 속에서 갓 나와 빛에 취해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났다. 포세이돈은 창을 들고 골짜기로 뛰어내려 가며 함성을 질렀다. 저 늙은 이들을 산 아래로 굴려 버리자고. 하데스조차 그날은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헤라도 그랬다. 그녀는 아버지의 배 속에서 오래 생각했다. 빛을 본 적 없는 어둠 속에서, 다른 아이들이 두드리는 소리를 세며. 나가면 무엇을 할지. 나가면 어디에 설지. 그녀는 그 생각만으로 몇 해를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빛 속에 섰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막내였다. 돌을 품에 안고 아버지를 마주 보던 막내.
그녀는 그날 그 자리를 쟀다. 막내가 서 있던 자리를. 그리고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첫 전투는 골짜기 한가운데서 벌어졌다. 아틀라스가 선봉이었다. 산 같은 어깨가 안개를 가르며 다가왔을 때, 포세이돈의 함성이 처음으로 끊겼다. 아틀라스는 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바위를 들었다. 집채만 한 바위를 두 팔로 안아 들고, 그것을 방패처럼 앞세우고 걸어왔다. 올림포스의 창끝이 바위에 부딪혀 부러졌다.
그날 해가 질 때, 형제들은 골짜기에서 산 중턱까지 밀려났다.
이튿날은 그들이 밀었다. 히페리온의 빛이 흐린 틈을 타서. 그다음 날은 다시 밀렸다. 크리오스가 별의 길을 읽고 그들이 오는 길목을 미리 막았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골짜기 한가운데의 개울이 한 해에 스무 번 주인이 바뀌었다.
헤라는 첫서리가 내린 아침, 바위에 첫 줄을 그었다.
둘째 해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셋째 해에는 비가 그치지 않았다. 골짜기가 진흙으로 차올라 양쪽 모두 반년 동안 내려가지 못했다. 넷째 해에 히페리온의 빛이 잠시 돌아왔다. 그해 올림포스는 낮에 싸우지 못했다. 눈을 뜨면 멀었다. 다섯째 해에 크리오스가 별을 잘못 읽었다. 하데스가 그 틈에 오트리스의 창고 하나를 불태웠다. 여섯째 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쪽 다 지쳐 있었다. 그해가 가장 길었다.
어머니 레아는 그 모든 해를 헤스티아의 불 곁에서 보냈다. 그녀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실을 짰다. 포대기가 아니었다. 전사들의 상처를 싸맬 천이었다. 그녀는 그 천을 짜며 가끔 맞은편 산을 보았다. 아주 잠깐씩. 헤라는 어머니가 무엇을 보는지 묻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지자 진영에도 모양이 생겼다.
헤스티아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맏누이는 진영 한가운데 돌을 둥글게 쌓고 불을 피웠다. 그 불은 꺼지지 않았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오트리스에서 날아온 바위가 근처에 떨어져도. 헤스티아는 밤마다 그 불 곁에서 잤다. 전사들은 싸움에서 돌아오면 먼저 그 불에 손을 쬐었다. 그것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표시였다.
데메테르는 진영 뒤 비탈을 일궜다. 서리가 내린 땅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땅이었다. 데메테르는 무릎을 꿇고 흙을 쥐어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의 배 속에서 나온 날처럼. 그리고 그 땅에 무언가를 심었다. 이듬해 봄, 비탈에 보리가 올라왔다. 누렇고 가늘고 볼품없는 보리였다. 그래도 그것은 올림포스가 처음으로 스스로 키운 것이었다.
하데스는 밤을 맡았다. 형제들 가운데 그만이 어둠 속에서 잘 보았다. 그는 밤마다 홀로 골짜기로 내려가 오트리스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아무 말 없이 본 것을 전했다. 몇 명이, 어디로, 무엇을 들고. 그리고 다시 바위 그늘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포세이돈은 늘 맨 앞에 섰다. 그는 지는 날에도 웃으며 돌아왔다. 상처투성이로, 부러진 창을 어깨에 걸치고. 아틀라스와 세 번 맞붙었고, 세 번 다 밀려났다. 그때마다 그는 다음엔 이긴다고 말했다. 헤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날은 진영이 너무 조용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무기를 세었다. 창이 몇 자루 남았는지, 청동이 얼마나 있는지, 오트리스가 다음에 어디를 칠지. 그의 예측은 대개 맞았다. 맞을 때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가 내다본 곳에는 늘 그의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데메테르를 도와 보리를 날랐다. 서툴러서 반을 흘렸다. 그래도 매일 날랐다.
그리고 메티스가 있었다.
회색 눈의 여자는 늘 막내 곁에 있었다.
군막 안에서도, 진영 끝 바위 위에서도, 밤늦게 헤스티아의 불 앞에서도. 그녀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막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아주 잠깐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끄덕이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막내의 결정은 늘 그 끄덕임을 따라갔다.
헤라는 그것을 보았다. 매일, 10년 동안.
그녀는 메티스가 싫지 않았다. 그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메티스는 영리했고, 공정했고, 무엇보다 옳았다. 그녀가 끄덕이지 않은 공격은 언제나 실패했다. 그녀가 끄덕인 퇴각은 언제나 누군가를 살렸다. 헤라가 아무리 무게를 달아 봐도, 저울은 메티스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헤라는 무게를 다는 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리를 재는 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잰 바에 따르면, 막내 곁의 그 자리는 메티스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영원히는.
넷째 해였던가, 다섯째 해였던가. 헤라는 군막 앞에서 메티스와 단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메티스는 막 군막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지도를 그린 가죽이었다.
"그를 오래 지켜보는구나." 메티스가 먼저 말했다. 질투도 경계도 없는 목소리였다.
"막내니까." 헤라가 말했다. "누군가는 지켜봐야지."
메티스는 회색 눈으로 헤라를 보았다. 그 눈이 아주 잠깐, 헤라의 손바닥을 향했다. 무언가의 무게를 달아 보려는 것처럼. 그러다 거두었다.
"너는 나보다 오래 그의 곁에 있을 거야." 메티스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날씨 이야기를 하듯. "나는 그 무게를 이미 달았어."
헤라는 그 말의 뜻을 오래 생각했다. 지금도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 그녀는 메티스를 미워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미워할 수 없는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저울 없이 무게를 다는 것만큼이나 헛된 일이었다.
아버지를 본 것은 일곱째 해의 일이었다.
그날 전투는 골짜기의 동쪽 끝, 바위가 층층이 쌓인 비탈에서 벌어졌다. 헤라는 처음으로 앞줄에 섰다. 포세이돈의 왼편이었다. 창을 쥔 손에 땀이 찼다. 그리고 비탈 꼭대기에, 그가 있었다.
크로노스는 싸우지 않았다. 그는 바위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낫은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헤라는 그 얼굴을 처음 보았다. 어둠 속에서 수없이 상상했던 얼굴. 그녀를 삼킨 자의 얼굴. 생각보다 늙어 있었다. 눈 밑이 검었다. 오래 잠들지 못한 자의 눈이었다.
그 눈이 비탈 아래를 훑다가, 아주 잠깐 그녀에게서 멈췄다. 헤라는 숨을 멈췄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받아 들고, 등을 돌리고, 삼켰을 뿐. 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것이 가장 아팠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창을 던졌다. 창은 비탈 꼭대기에 닿지 못했다.
여덟째 해 겨울, 진영이 무너질 뻔했다.
그날 밤 하데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골짜기에서 땅울림이 올라왔다. 아틀라스였다. 그는 밤을 틈타 산 뒤편의 가파른 비탈로 돌아 올라왔다. 아무도 오르지 못하리라 여긴 길이었다. 크리오스가 별을 읽어 경계가 가장 얇은 시각을 골랐다. 히페리온은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 숨었다.
헤라가 그들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헤스티아의 불가에 앉아 있었다.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산 같은 어깨가.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단 한 번. 그리고 불가의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영이 깨어나는 데 숨 몇 번이 걸렸다. 그 숨 몇 번 동안 헤라는 혼자 서 있었다. 장작 하나를 든 채로, 아틀라스와 헤스티아의 불 사이에. 아틀라스가 그녀를 보았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장작을 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헤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의 배 속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드리는 것밖에. 이제는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장작을 휘둘렀다. 불똥이 아틀라스의 얼굴로 흩어졌다. 거인이 한순간 눈을 감았다.
그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포세이돈이 옆에서 뛰어들었다. 데메테르가 보리밭에서 낫을 들고 달려왔다. 비탈 아래에서 하데스가 나타나 히페리온의 다리를 걸었다. 그는 내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신호를 보낼 틈이 없었을 뿐.
새벽이 될 때까지 싸움이 이어졌다. 아틀라스는 결국 물러났다. 헤스티아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헤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작을 쥐었던 손바닥이 데어 있었다.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흘렀다. 그녀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 손목을 잡았다.
막내였다.
제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을 펴 보았다.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헤스티아의 불가에서 데메테르가 끓인 보리죽을 한 숟가락 떠서 식힌 다음, 그것을 그녀의 손바닥에 얹었다. 따뜻하고 끈적했다. 아팠다.
"왜 혼자 섰어?" 제우스가 물었다.
"누군가는 서야 했으니까." 헤라가 말했다. "너는 저쪽 끝에 있었고. 메티스 곁에."
제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목을 놓기 전에, 엄지로 아주 짧게 맥이 뛰는 자리를 눌렀다. 헤라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 자리를 자주 만져 보았다.
열 번째 아침, 헤라는 바위 앞에서 단검을 멈춘 채 서 있었다.
골짜기가 내려다보였다. 10년 전에는 풀이 있었다. 지금은 없었다. 불탄 흙과 부러진 창과 깨진 바위만이 남아 있었다. 개울은 몇 번이나 물길이 바뀌어 이제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오트리스의 꼭대기에는 여전히 횃불이 타고 있었다. 10년 전과 같은 수의 횃불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10년 동안. 빼앗고, 빼앗기고, 다시 빼앗았을 뿐.
그녀는 단검을 내리고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
군막 안에는 모두 모여 있었다. 제우스와 메티스, 형제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어머니 레아. 그들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헤라가 말했다.
"열 번째 해야."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10년 동안 같은 골짜기를 빼앗고 빼앗겼어. 포세이돈은 아틀라스에게 세 번 졌고, 하데스는 매일 밤 내려갔다가 돌아왔고, 데메테르는 보리를 열 번 심었어. 헤스티아의 불은 한 번도 꺼지지 않았지." 그녀는 데인 자국이 아직 남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어. 저쪽도 마찬가지고. 이대로면 백 년이 가도 똑같을 거야."
군막 안이 조용했다.
"그래서." 제우스가 말했다. 처음으로 메티스를 보지 않고 헤라를 보며.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나도 몰라." 헤라가 말했다. "그런데 하나는 알아. 우리는 지금 저쪽이 가진 것과 똑같은 것으로 싸우고 있어. 창과 바위와 밤. 똑같은 것으로 싸우면 끝나지 않아. 저쪽에 없는 걸 가져와야 해."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메티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만큼은 그 끄덕임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때 땅이 울렸다.
전투의 땅울림이 아니었다. 더 깊고, 더 느리고, 더 오래된 울림. 군막 바닥의 흙이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젖은 흙과 풀 냄새가 퍼졌다. 레아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그 냄새를 알았다.
흙 속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오래 걸렸구나."
대지였다. 가이아. 10년 동안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던 할머니가, 지금 군막 바닥에서 손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저쪽에 없는 것." 가이아가 말했다. "그것은 땅 밑에 있다. 크로노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하늘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청동 문 너머에서 10년 동안,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벽을 두드리고 있는 내 아이들." 흙이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 문을 여는 자가 이 전쟁을 끝낸다."
제우스가 일어섰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말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보였다.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진영에 왔던 날, 땅 밑을 보던 그 눈으로.
헤라는 그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이 무엇을 찾는지 알았다. 막내는 지금 누구를 보낼지 고르고 있었다. 형제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헤라는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얼마나 큰지 그녀 자신도 놀랐다.
제우스의 시선이 바위 그늘 쪽에서 멈췄다.
하데스였다. 어둠 속에서 가장 잘 보는 자.
헤라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손바닥의 데인 자국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그 아픔을 쥐었다.
"문 앞에 파수꾼이 있다." 가이아의 목소리가 덧붙였다. "크로노스가 세운 것. 잠들지 않는 것. 허리 아래로 뱀이 들끓고 등에 전갈의 꼬리가 솟은 여자. 캄페." 흙이 한 번 크게 숨을 쉬었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그 앞까지 갈 수 있다."
하데스가 바위 그늘에서 눈을 떴다. 그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짧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형제들 가운데 그 끄덕임을 본 것은 헤라뿐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깨달았다. 막내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하데스는 처음부터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10년 동안 밤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서, 그는 언제나 그보다 더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다시 바위 앞에 섰다. 단검을 꺼내 바위 표면에 댔다. 위에서 아래로. 그러나 열 번째 줄은 끝까지 긋지 않았다. 절반에서 멈췄다. 날 끝이 돌에 박힌 채로, 헤라는 땅 밑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 제9화 끝 —
이야기 속 유물
베일을 쓰고 한 손에 홀을, 다른 손에 제주(祭酒)를 따르는 그릇을 든 헤라의 상이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수집가 캄파나 후작의 소장품이었다가 루브르로 옮겨져 그 이름으로 불린다. 훗날 신들의 여왕이 될 헤라는 늘 이처럼 꼿꼿하게 선 모습으로 새겨졌다.
〈헤라 캄파나〉, 작자 미상 (그리스 원작을 본뜬 로마 시대 대리석상), 2세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위키미디어 커먼즈, Public domain